시편 119:12
(시 119:12)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Praise be to you,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찬송을 받으실” 부분을 영어성경 KJV에서는 “Blessed are you”라고 번역을 했는데, 주님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자체가 복이기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처럼 보통은 어떤 사람이 왜 복이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님은 주님 자체가 복이기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역작인 신학대전을 쓴 후에 기도하던 중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에 대해서 참 좋은 글을 썼구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퀴나스의 대답입니다. “오직 주님만….” 다윗 또한 시편 16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복들이 있지만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복입니다.
“가르치소서”라는 말은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다”라는 뜻으로, 주로 동양 문화권에서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시인은 학생이고, 시인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 듣기 좋은 말만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찌르는 아픈 가르침 또한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지도할 때, 혹 우리는 내가 듣기 좋은 말들만 골라서 받지는 않는지요? 내 귀에 거슬리거나 내 마음에 불편한 말씀들에 대해서는 귀와 마음을 닫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날은 설교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설교를 얼마든지 골라서 들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사람들 중에는 내 취향에 맞는 설교와 가르침만을 골라서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영적으로 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편식이 우리 몸의 영양 균형을 깨트리듯이 영적인 편식도 우리 신앙의 균형을 잃게 만듭니다. 건강한 성도는 내 마음에 위로와 복이 되는 말씀 뿐만 아니라 내 죄를 드러내고, 내 잘못을 찌르는 말씀 또한 달게 받습니다. 줄타기 곡예사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긴 봉을 손에 잡고 중심을 잡는데, 말씀은 우리 신앙의 중심을 잡아주는 긴 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