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의 작사자는 피득(A.A. Pieters)입니다. 피득의 영어 이름은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한국명 피득, 1871-1958)인데, 그는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살다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그의 본래 유대식 이름은 이삭 프룸킨(Itzhak Frumkin)이었는데,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 알버터스 피터스(Albertus Pieters)의 이름을 따라 Alexander Albert Pieters 로 개명을 합니다. 그가 이름을 개명한 것을 보면 그의 엄격한 정통 유대 가문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아들을 더 이상 받지 않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895년 피터스 목사는 선교사로 한국에 옵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습니다. 그는 언어의 귀재로 히브리어는 물론 라틴어, 헬라어, 러시아어, 독어, 불어, 영어 등에 익숙했고,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한국어를 익혀 평소 애송하던 시편 62개를 번역하여 1898년에 ‘시편촬요’(詩篇撮要)를 출판합니다(촬요는 요점만 골라 모은다는 뜻). 이는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말씀입니다. 당시 한국 성도들은 시편촬요를 통해 처음으로 구약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피터스 목사가 번역한 시편 67편(주여 우리 무리를)과 121편(눈을 들어 산을 보니)는 찬송가 가사로도 만들어져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습니다.
피터스 목사의 이런 사역 뒤에는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함께 선교를 준비해 한국 땅을 밟았던 아내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은 서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폐결핵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그 후 재혼한 세브란스 병원의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Eva Henrietta Field) 또한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분의 묘소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피터스 목사의 묘소는 미국 Mountain View Cemetery 에 자리잡고 있습니다(피터스 목사는 1941년 은퇴 후 미국에 돌아와서 생을 마감함).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초창기에 왔던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온 가족들 또한 척박한 한국 땅에서 많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는 저절로 맺히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맺힙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한 알의 밀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