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삼경(四書三經)중 사서(四書)는 논어•맹자•대학•중용인데, 중용(中庸)은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와 태도를 말해줍니다. 중용에는 중용적 삶의 백미인 자득(自得)의 원리가 있습니다. 원문을 잠시 소개합니다. “군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내가 부한 자리에 있으면 부한 자로서 멋진 중용적 삶을 살 것이며, 내가 빈천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빈천한 자로서 멋진 중용적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비문명 지역에 갇혀 고립과 단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나다운 삶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중용이 가르치는 자득의 삶이란 인생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중용적 삶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문명과 단절된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삶을 찾아 역량을 발휘했기에 정약용은 실학의 꽃을 피웠고, 김정희는 추사체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중용이 말하는 자득의 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하든 거기에 맞춰 자족하며 사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부하면 부한 상황에서, 갇힌 상황이면 갇힌 상황에서, 궁핍하면 궁핍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자득(자족)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분수를 직시할 때,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한번은 고라와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말합니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하나님이 그들 위에 계시는데, 어찌하여 너희들만 총회 위에 서서 지도력을 행사하느냐고 하면서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이에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들과 우리 사이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너희들에게 주신 귀한 사역들이 있는데, 그것에 자족하지 않고 너희 분수를 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삶의 분수(달란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신 달란트에 자족하며, 열심히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