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사뮤엘 베게트(Samuel Beckett)의 희곡 중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전체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막이 오르면 마른 나무가 있는 황량한 무대에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여기에 왔지만 정작 그들은 고도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가 오면 그들은 구원받는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기다립니다. 누군가 작가에게 고도가 누구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작가는 “그걸 알았다면 내가 작품에 썼을 것이요.”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인가요?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지구촌은 강자와 약자가 아닌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며, 빠른 자는 승리하고 느린 자는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오늘날은 빠른 것이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대인들은 기다림을 도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은 도태되는 시간이 아닌 내실을 다지고, 보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뿌리를 깊이 내리는 시간입니다. 산모는 10달을 기다려야만 온전한 생명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아노 속에는 240개의 쇠줄이 있는데, 각각의 쇠줄은 4만 파운드나 되는 강한 힘으로 끌어 당겨 고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팽팽한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긴장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기다리는 동안 우리 내면에는 치열한 갈등과 긴장이 있는데, 이것은 역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고 성숙케 하는 요인이 됩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핵심 메시지는 메시야가 이 땅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때가 찼을 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기다림인가요?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실 때, 천사는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천사는 승천하신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날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고도를 기다린 두 사람은 무엇을 기다리고, 왜 기다리는지를 몰랐지만 오늘날 성도는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다시 약속합니다. 이에 요한은 고백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우리 또한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끝까지 기다리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