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기에 인도의 벵골인들은 사탕수수에서 채취한 당즙을 졸여서 결정체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설탕입니다. 정제한 설탕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입맛에 신세계를 경험케했습니다. 또한 설탕은 만병통치약으로도 여겨졌는데,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설탕을 가리켜 설탕은 식품이 아닌 소화촉진용 약품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설탕의 이면에는 어두운 역사도 있습니다. 16-19세기에 많은 흑인들이 카리브해와 브라질, 미국 남부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갔는데, 끌려간 흑인들로 인해 정작 아프리카는 일할 청년들이 없어서 성장 동력을 잃어 지금까지도 가난과 굶주림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은 풍토병과 중노동으로 죽어갔기에 1791년 영국의 윌리엄 폭스는 “설탕 1온스(28g)는 인간의 살 2온스와 같다”고 하면서 카리브산 설탕 불매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설탕 맛에 중독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탐험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인도의 마발 지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한번은 시장을 둘러보던 마르코 폴로는 악마상을 하얗게 칠하는 도공을 봅니다. 보통은 천사와 선한 것은 흰색으로 칠하고, 악마와 악한 것은 검은 색으로 칠하는데, 악마를 하얗게 칠하는 도공을 보면서 그 이유를 묻습니다. 도공의 대답입니다.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얗게 치장한 악마는 우리에게 와서 그럴싸한 말로 악을 선이라 속이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탄의 말은 우리에게 설탕과 같이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와 결국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에 빠트립니다.
성경에서 단맛의 대명사는 꿀입니다. 꿀은 단맛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풍요로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꿀처럼 단 말씀이라고 비유합니다. (시 19: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잠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사탄의 달콤한 말은 우리 영혼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의 달콤한 말씀은 우리 영혼을 생명과 영생의 길로 인도합니다. 어느쪽 달콤함에 취하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