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 목사와 함께 사역했던 한국인 여성 킴 윅스(Kim Weeks)가 있습니다. 윅스는 자기 본명을 모릅니다. 윅스는 3살 때 한국전쟁이 나서 피난가던 중 인민군이 쏜 포탄의 섬광에 실명했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점점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한번은 달려오는 트럭 앞에 온가족을 모아놓고 함께 죽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아버지는 윅스와 여동생을 강물에 던집니다. 동생은 강물에 떠내려갔고, 윅스는 간신히 구조되어 대구에 있는 월드비전 장애인 고아원에 들어갑니다. 윅스는 홀트 양자회의 주선으로 10살 때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홀트의 친구인 조지 윅스 부부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 후 윅스는 양부모의 사랑과 지도 아래 순탄하게 성장해서 인디애나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 과정까지 마친 후,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생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성악을 공부합니다.
윅스는12살 때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있었던 빌리 그래함 집회에 참석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악을 공부한 후에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고, LA 헐리웃 볼(Hollywood Bowl)에서 25주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에 특별 초청되어 성가를 불렀습니다. 당시 그래함 목사는 “그녀의 성가는 할리웃 볼에서 들어본 노래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극찬했고, 윅스는 그 뒤 빌리 그래함 전도단의 찬양 독창자가 되어 전세계를 다녔습니다. 윅스는 한국을 떠난 지 1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합니다. 당시 아버지는 신문에 난 윅스의 기사를 보고 수소문 끝에 윅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이 병들었는데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장환 목사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윅스는1974년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와 상봉합니다. 윅스는 한국에 두달 간 체류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TV에도 출연하고, 전국순회공연도 가졌습니다. 1981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킴 윅스 자선음악회를 열어 천상의 소리를 고국 사람들에게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에서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100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나를 인도하는 분을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 2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우리를 하나님이 약속하고 계획하신 그 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