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눈물을 모아 보관하는 눈물 단지(tear jar)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 풍습에는 문상 온 친척이나 친구들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흘린 슬픔의 눈물을 눈물 단지에 넣은 다음 무덤 속 고인의 시신과 함께 안치했다고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 풍습에는 장례를 주관하는 사제가 문상 온 사람들이 애곡하는 중 슬픔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눈물 단지에 받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병자의 입 속에 떨어뜨리면 기적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편 56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블레셋으로 망명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은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갔을까요? 그만큼 다윗이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의 칼을 피해 도피할 곳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무고하게 쫓겨 고국 땅을 등지고 블레셋으로 망명한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을 겁니다. 8절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시 56: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내가 사울을 피해 유리하면서 흘린
눈물을 주의 눈물 단지(병)에 담으시고 나의 억울함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지만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은 세 번 나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렸고(요 11:35),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며 우셨습니다(눅 19:41).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 이 땅의 성도들 또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삽니다. 아마도 그 눈물을 눈물 단지에 모은다면 엄청난 양이 될 겁니다. 때로는 남몰래 흘린 아픔의 눈물도 있었을텐데, 하나님은 성도의 뼈아픈 눈물을 놓치지 않고 당신의 눈물 병에 담습니다.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요? (계 7: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계 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더 이상 눈물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 봅니다.